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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맹목적인 사랑, 외동아들에 대해 우쭐해하는 아버지의 어리석고 맹목적인 자부심, 몸에 달고 다닐 장신구를 얻기 위하여, 그리고 사내들이 자기들을 경탄의 눈길로 바라보도록 하기 위하여 애쓰는 허영심 많은 젊은 여인들의 맹목적이고도 거친 열망, 이 모든 충동들, 이 모든 어린애 같은 유치한 짓들, 이 모든 단순하고 어리석은, 그렇지만 어마어마하게 강한, 억센 생명력을 지닌, 끝까지 강력하게 밀어붙여 확고한 자리를 굳히는 충동들과 탐욕들이 싯다르타에게는 이제 더 이상 결코 어린애 같은 짓으로 여기지지 않았다. 그는 바로 그런 것들 때문에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바로 그런 것들 때문에 사람들이 무한한 업적을 이루고, 여향을 하고, 전쟁을 일으키고, 무한한 고통을 겪고, 무한한 고통을 감수한다는 것을 알았다.
지식과 달리 지혜는 전달되지 않는다. 지혜는 스스로 깨달은 지식이다. 돈이 행복을 결정짓지 않는다고 해서 돈을 따르지 않는가? 고등학생때 집안이 파산을 하기 전에는 그게 무슨 의미인 줄 전혀 몰랐다. 시간이 지나고보니 정말 돈이란 것이 없다고 별 일 생기는 것도 아니고 있다고 특별히 행복을 얻지도 않았다. 가난해졌다가 부유해진 것은 내 마음 뿐이었다.
정치적, 사상적, 행동적, 어떤 관점에서든 바보같은 짓들이 왜 바보짓인줄 어떻게 아는가? 호기심에 엄지 손가락을 뭉텅 깨물고 울어버린 아이의 깨달음과 같다. 적어도 바보짓을 직접해보았거나, 직접 해볼만큼 가까이서 체험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가르침으로부터, 스승들한테서 네가 배우려고 하였던 것이 무엇이며, 너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던 그들이 도저히 가르쳐줄 수 없었던 것이 무엇이지?’
책으로부터 가르침을 얻어 깨달음을 얻으려고 하고, 직장인 주니어는 늘 배울 시니어의 지식을 찾아다닌다.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가르침을 스스로 얻는 것이다. 체험에서 얻지 못한, ‘관광적’ 접촉으로는 아무것도 공감할 수 없다.
생각은 낭비라고 말하는 지두 크리슈나무티(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유의미한 경험으로부터 갈등을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한 올 포트(접촉 가설), 바스티안 베르브너(혐오없는 삶), 현대인의 거짓 자유에는 자발성이 없다고 말하는 에리히 프롬(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유일한 진리가 아니라 개인의 진리를 찾아내려던 키르케고르(크레도 퀴아 압수르둠(Credo quia absurdum)를 서사로 연결한 듯한 그런 느낌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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